동네마다 책방과 독립서점이 있어야 하는 이유
동네마다 책방이 있어야 하는 이유
자기다움이 사라진 시대
책방에서 독서모임을 하다보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참여가능할까요? 무식이 탄로날까봐 두려워요”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차저차해서 참여를 하더라도 사전에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의 서평이나 관점을 사전에 보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그 분과 나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은 별 다를 게 없습니다. 조금 더 편안하게 참여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상호 모방”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SNS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고, 모든 사람이 비슷한 정보를 공유하며 획일화된 사고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는 “지적 게으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을 의식할까요? 이런 현상은 우리의 획일화된 교육 시스템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학업성적이 우수하지만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세계를 이끄는 기술을 ‘창조’하기보다는 기존 기술을 충실히 학습해서 따라가거나, 활용하는 수준에서 장점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가 아직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창의력 때문이 아닐까요. 서구에는 디자인 하우스가 있었고, 아이폰을 만들었으며, 지성을 지배하는 여러가지 사상도 나왔습니다. 문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은데, 우리 것을 지키려면 독창성이 있어야 합니다.
OECD 국가별 성인 1인당 월간 독서량을 보면 미국 6.6권, 일본 6.1권, 프랑스 5.9권인 반면, 우리나라는 0.8권으로 세계 최하위권(166위)입니다. 이렇게 책을 안보는 나라인데 선진국이니 아니니 하는 소리도 나오고,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국가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책을 안읽어도 이 정도인데, 읽는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AI의 시대야말로 창의력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의력은 거창한 발명이나 예술적 천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처럼 사는 삶”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자기다움을 실현하는 핵심 공간으로 동네책방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창의력을 이야기하면서 왜 동네책방이 나오냐 싶을수도 있겠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기 때문에 자라는 과정, 동네를 거닐면서 사유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적 산물들을 접하는 것이 창의성 계발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네책방의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이 풍부한 장소입니다. 동네책방은 단순한 상업공간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고유한 취향과 사고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적 거점입니다. 그렇기에 동네마다 책방이 하나씩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단순한 문화정책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사회적인 가치와 직결됩니다.
자기다움의 실현 공간
동네책방은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하고 키워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대형서점에서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추천 알고리즘에 의존하게 되지만, 동네책방에서는 책방 주인의 취향과 철학이 담긴 선택의 공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책방은 독립출판물 중심으로, 또 어떤 책방은 여행과 일상을 주제로 한 선별된 도서로 각각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개성을 가진 서점이 많을 수록 우리는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고 사고할 수 있습니다.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과 확연히 다른 점입니다.
동네책방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 욕망을 충족하는 ‘정원’과 같은 공간입니다. 마치 집안의 정원이 실용적 목적보다는 아름다움과 여유를 위한 공간이듯, 동네책방은 우리 삶에 여백과 깊이를 더해줍니다. 건축에서 목적 없는 공간을 두거나 비워두는 것은 사용자가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여백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책방을 여백으로 두시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목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런 여유로운 공간이 있어야 ‘정해진 마음’에서 벗어나 느슨해진 상태에서 ‘자기다운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획일화된 대형서점과 달리 동네책방은 개성 있는 공간입니다. 도서관과의 차별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서관은 주로 검증된 전문가를 섭외하는 강의나 세미나 위주로 운영되지만, 독립서점은 시민 개개인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다른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시민들이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문화 활동의 기획자이자 진행자로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동네책방들이 글쓰기에 관심 있는 시민들에게 출판 과정 안내, 인터넷 플랫폼 활용법 등 다양한 도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배양지
동네책방의 가장 큰 매력은 예상치 못한 발견에 있습니다. 책방 주인의 독특한 책 선정을 통해 우리는 평소라면 접하지 못했을 책들과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 작은 책방에서 프로파간다 출판사의 책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메이저 출판사의 느낌이 나는 곳이지만, 당시 책인지 포스터인지 모를 파격적인 표지 디자인이 무척 신선했습니다. 이처럼 상업성보다 작품성을 추구하는 책들은 인생에서 우연히 만나는 독특한 사람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우연한 만남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끕니다. 알고리즘(온라인 서점의 추천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 이런 우연함이 창의력의 원천입니다. 도서관과 대형서점이 이미 검증된 콘텐츠 위주로 운영된다면, 작은 서점은 주인 혹은 지역민의 취향을 따르기 때문에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류에서 벗어난 목소리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희 책방에서도 이러한 창의적 큐레이션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책방의 독특한 큐레이션은 무엇일까요? “문학과 인문학 위주로 시작하고, 독립서적은 소량만 두고 반응을 보자.” 그러다보니 거의 다 메이저 출판사의 책이 자리잡았고, 저희만의 아이덴티티는 없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책방을 운영하다보니 ‘책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아이덴티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주류’라고 하는 책을 들여왔는데, 저희 동네 사람들에게는 ‘비주류’로 통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책에 대한 ‘새로운 발견 가능성’은 독서인들에게는 또다른 매력입니다. 일본의 한 서점 경영 전문가는 ‘독자가 아는 책과 모르는 책이 적절하게 조화로워야 비로소 그 서가는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독자가 모두 알거나, 모두 모르는 책이면 흥미를 잃는다는 것입니다. 동네마다 독자들의 성향이 다릅니다. 따라서 지역 독자들과 상호작용하는 각 동네 서점도 다루는 책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네책방에서 운영되는 북클럽은 단순한 책 읽기를 넘어 자기 성찰과 깊이 있는 토론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중심으로 토론과 작문을 통해 느리고 깊게 읽는 방법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빠른 소비 문화에 대한 대안이며, 실제로 저희 책방 북클럽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모여 책을 중심으로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제 언어가 풍성할수록 제가 감지하는 세계는 다채로워집니다. 다양성은 진보와 가까운 말입니다. 같은 주제라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책들을 접하며, 획일화된 사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서점의 알고리즘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예측 가능한 추천을 하는 AI 시대에 이런 우연한 만남의 공간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역할
동네책방은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 지식의 집합체이자 소통의 장입니다. 여기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만나며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학생부터 은퇴하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분들이 모입니다. 이분들은 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세대와 계층을 넘나드는 소통을 합니다. 할머니께서 손자에게 책을 읽어주시고, 대학생이 중학생에게 진로 상담을 해주시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도서관이 공공성과 체계성을 중시한다면, 작은 책방은 시민이 직접 주도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창의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지역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개인출판물을 전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민들께서 직접 시 낭송회를 기획하시거나, 지역 역사 사진전을 여시거나,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만들기 워크숍을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주체적 참여를 통해 지역 고유의 문화 활동이 생겨나고, 진정한 의미의 문화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책방에서 열리는 작은 모임들은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동네의 환경 문제를 논의하는 시민 모임, 지역 역사를 발굴하는 연구 모임, 아이들을 위한 독서 동아리 등이 모두 이런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런 다양한 활동들이 축적되면서 책방은 자연스럽게 지역 공동체의 문화활동 중심지가 됩니다. 스마트폰과 온라인이 일상화된 시대에, 이런 아날로그적 만남과 우연한 발견의 공간은 더욱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방의 가치는 이런 적극적인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 외에도 동네 책방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역 공동체의 문화적 상징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책방은 그 존재만으로도 동네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퇴근 길에 따뜻한 조명이 비치는 책방 앞에서, 사람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진열된 책들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일상에 지친 마음에 작은 위안과 영감이 스며듭니다. 독서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거나 지식과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책방은 동네 사람들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 잡습니다.
문화공공재로서의 동네책방
동네책방은 상업공간을 넘어선 문화공공재입니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배양하는 우연한 만남의 공간이자, 지역 공동체 문화 창출의 거점입니다. 온라인 서점의 알고리즘이 예측 가능한 추천을 하는 AI 시대에, 동네책방은 예측 불가능한 발견과 진정한 창의력의 원천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발간한 ‘2024 지역서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서점이 없는 지자체가 6개, 1개만 남은 위험 지역이 21개에 달합니다. 10곳 중 7곳이 연매출 2억원 미만으로 경영난이 심각합니다.
도서 판매만으로는 서점 경영이 어려운 현실에서 식음료 및 굿즈 판매, 공간 임대, 유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책방을 단순한 서점에서 복합 문화공간으로 진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지속되려면 시민들의 적극적 이용과 참여, 그리고 정책적 지원도 필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역 커뮤니티와 밀착한 각각의 책방은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지역의 특색을 반영해 다양한 문화적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손자에게 책을 읽어주시고, 대학생이 중학생에게 진로 상담을 해주며, 시민들께서 직접 시 낭송회를 기획하고 지역 역사 사진전을 여시는 공간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획일화된 문화 소비에서 벗어나 진정한 다양성과 창의성이 꽃필 수 있습니다.
동네마다 책방이 하나씩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에, 아날로그적 만남과 우연한 발견의 공간이 더욱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책방이 있는 동네와 없는 동네의 차이는 단순히 책을 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풍요로움과 공동체 의식의 차이입니다. 동네마다 책방이 하나씩 있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