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독특하고 함축적인 작품인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이 학교에서는 하인이 해야 하는 어떤 기술도 배울 수 없습니다.
오직 “복종”만을 가르치는 기묘한 학교에서 주인공 야콥은 겉으로는 순종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키워가며 이 낯선 세계를 바라봅니다.
복종이라는 낯선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하인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 기억합니다.『벤야멘타 하인학교』는 단순한 성장 소설이나 드라마틱한 서사가 아니라, 그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의 자아에 질문을 던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번 독서모임에서는 이 낯설고도 묘한 작품을 중심으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을 마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복종의 역설 – 자유를 위한 자발적 순응
주인공 야코프는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며 벤야멘타 학교에 입학합니다. 이러한 자발적 복종은 단순한 체제 순응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며 권력에 대한 전복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복종은 순종이 아닌, 내면의 자각을 통해 체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지요.
학교의 훈련은 무의미하고 형식적이지만, 야코프는 그 속에서 의미를 길어냅니다. 무의미한 세계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의미를 발명해내는 것—그 자체가 역설적 자유를 향한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대적, 철학적, 존재론적 층위
1) 교육의 무의미함과 해체
학교는 하인을 만든다는 목적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기계적 훈육만 반복될 뿐입니다. 이 시스템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그 안의 인물들—리사와 요한 벤야멘타—조차 존재 이유를 점차 상실하게 됩니다.
2) 야코프의 자각과 탈출
야코프는 학교의 무의미함을 인식하고 결국 ‘밖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제자의 이탈이자 고전적 질서의 해체이며, 동시에 ‘동굴을 나온 철학자’의 메타포처럼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근대 사회 질서의 붕괴
학교의 붕괴는 단지 하나의 기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복종·형식·권위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적 질서의 한계와 붕괴를 상징하는 서사입니다.
철학적 해석 – 존재의 해체와 다시쓰기
1) 존재론적 해석: “나는 누구인가”
야코프는 귀족 출신임에도 의도적으로 하인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출신, 계급, 역할이라는 외적 지표를 벗어던지고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 선언은, 자기 존재의 조건을 다시 설정하려는 철학적 실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권력과 복종의 철학: 푸코적 시각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듯, 권력은 신체와 정신을 조율하며 내면화됩니다. 벤야멘타 학교는 이러한 권력의 대표적 실험장이며, 야코프의 자발적 복종은 그 권력 체계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3) 언어와 글쓰기의 존재론
이 소설은 일기 형식을 취함으로써 언어를 통해 세계와 자아를 중개하는 철학적 실험을 수행합니다. 야코프의 끊임없는 글쓰기는 곧 존재의 증명이 되며, 흐름과 단편, 중단이 섞인 그의 글은 완결보다 존재 자체를 드러냅니다.
4) 예술가로서의 존재 태도
야코프는 주입식 교육 안에서도 스스로를 형성하고 의미를 창조해냅니다. 이는 카프카가 말한 “작가는 점점 투명해지며 사라져가는 존재”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하며, 예술가란 자기 세계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임을 상기시켜줍니다.